여행이 끝나고, 마음이 멍해졌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면 꼭 이틀쯤 뒤에야 그 사실이 실감난다. 처음엔 짐을 풀면서도 현실로 돌아왔다는 걸 잘 느끼지 못한다. 캐리어에서 구겨진 옷을 꺼내고, 아직 남은 모래가 가방 바닥에서 바스락댈 때쯤, 그제야 '아, 다녀왔구나' 싶다.
이상하게도 나는 여행이 끝나고 나면 종종 허무해진다. 즐거웠던 만큼, 반짝였던 순간들이 현실로 돌아오는 길을 더 힘겹게 만든다. 특히나 여름 여행은 더 그렇다. 햇살은 뜨겁고, 사람들은 모두 조금 더 가볍게 웃고, 마음은 들떠있고, 그런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끝나버리는 기분.
돌아오는 비행기 안, 창밖으로 붉게 물든 구름을 보면서 괜히 울컥한 적도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게... 사진은 잔뜩 남았지만, 마음은 비어버린 것 같았다.
친구들은 “여행 좋았겠다~” 하며 웃는데 나는 이상하게 대답이 망설여졌다. '응, 너무 좋아서 지금 너무 허전해.'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다가 조용히 삼켜진 날도 있었다.
내가 이상한 건 아닐 거야.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런 감정을 한 번쯤은 느껴봤을 거라 믿는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여행 후유증을 느낄 때 어떻게 천천히 다시 일상으로 걸어 나오는지,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가 겪은 후유증, 그리고 회복 루틴
여행에서 돌아온 첫날 밤은 늘 이상하다. 분명 집인데 낯설고, 분명 침대인데 편하지 않다. 몸은 피곤한데 잠이 쉽게 오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그날 아침 공항에서 찍은 사진이 어른거리고, 샤워하다 말고 괜히 핸드폰으로 비행기 날씨를 검색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찾아온 건 피로가 아니라 허탈감이었다. 이틀 전만 해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웃고 있었던 나였는데, 지금은 에어컨 소리만 울리는 방 안에서 무기력하게 쌓아놓은 빨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온도차가 너무 커서, 마음이 따라오질 못했다.
사람들이 말하곤 했다. "여행은 힐링이지!" 하지만 내겐 가끔 '현실에서의 탈출' 같은 의미에 가까웠다. 그만큼 열심히 준비했고, 그만큼 기대했고, 그래서 돌아왔을 때의 그 공허함도 더 깊었다. 내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끝이 이렇게 아릴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 나는 회복이라는 단어 대신, '천천히 다시 걷기'라는 표현을 쓴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않고, 느긋하게, 내 속도가 허락하는 만큼만 하루를 회복해나간다.
먼저 하는 건 저녁 산책이다. 늘 가던 동네인데, 그날은 유난히 바람이 살갗에 부드럽게 스쳤다. 이어폰을 끼고, 여행지에서 들었던 음악을 틀고, 조용히 걸으면서 그 도시의 냄새, 골목의 소리,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하나하나 떠올려본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김없이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진다. 하지만 그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천천히 느끼면 조금은 편해진다. 그게 나에게 필요한 첫 번째 루틴이다.
두 번째는 '사진으로 하루 회고하기'. 밤마다 조용히 사진첩을 넘기다, 마음이 머무는 사진 하나를 고른다. 그리고 노트 앱을 켜서 그날의 기억을 짧게 적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7월 12일. 해변 끝자락 카페에서 마신 복숭아 아이스티. 그날의 너는 한참 웃고 있었고, 나는 그걸 몰래 찍었다." 누구에게 보일 것도 아닌 글인데, 이상하게 그 한 줄에 마음이 풀린다. 기억이 글이 될 때, 추억이 비로소 나만의 것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은, 음악. 무작정 플레이리스트를 트는 게 아니라, 그 여행에서 자주 들었던 곡만을 모아 작은 재생목록을 만든다. 비행기 안에서 들었던 잔잔한 피아노곡, 해 질 무렵 드라이브 중 들은 어쿠스틱 발라드, 호텔 창문을 열어두고 흐르던 재즈. 그 소리들은 단순한 멜로디를 넘어서 그때의 풍경, 공기, 감정까지 함께 끌어올려준다. 듣다 보면 가끔은 울컥하지만, 그 울컥함 속에서 나는 천천히 정리되고 있었다.
누군가에겐 참 별것 아닌 루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내 마음을 돌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치 여행을 준비하듯, 회복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나는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소중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여행이 추억이 되는 순간은 단순히 돌아오는 게 아니라, 그 여행을 내 안에서 한 땀 한 땀 잘 눌러담았을 때 시작되니까.
당신에게도 조용한 회복이 찾아오길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어쩌면, 지금쯤 여행에서 돌아온 후의 정적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틈에서 웃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용한 방 안에 앉아 카톡 알림조차 없는 핸드폰을 멍하니 들여다보고 있는 그런 밤.
나는 그런 순간이 가장 외로웠다. 무언가를 열심히 사랑하고, 깊이 즐겼다는 건 그 끝에서 마음이 아릴 수 있다는 걸 의미하니까. 여행은 좋았고, 그 시간은 선명했지만, 현실로 돌아오는 문턱에서 나는 자주 머뭇거렸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다시 일상이지!" 그 말이 맞는 것도 같고, 너무 잔인한 것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표현보다는 일상을 '다시 만들어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느꼈다. 하루하루, 낡은 익숙함 속에서 여행에서 배운 새로움들을 끼워 맞춰보는 일.
가끔은 여행이 나에게 준 선물이, ‘다녀온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리워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감정이 있어야 오늘 하루도 더 따뜻하게 느껴지니까. 물론 그리움은 무겁다. 하지만 그 무게 덕분에 내 삶은 더 진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회복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다만 어느 밤, 생각 없이 듣던 음악 한 곡에 마음이 더는 쿵 내려앉지 않을 때, 어느 아침, 우연히 꺼낸 옷 주머니에서 입장권 하나가 나와도 웃을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조금 괜찮아진다.
혹시 당신도 지금 그런 후유증을 겪고 있다면,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당신만의 속도로 다시 일상을 만들 수 있다고, 이 글이 조용히 말해줬으면 좋겠다.
여행은 끝났지만, 그 안에서 당신이 진심으로 웃었다면 그건 절대 사라지지 않는 감정이다. 지금은 잠시 마음이 멍하더라도, 곧 다시 웃게 될 거라는 걸, 나도, 당신도 잘 알고 있잖아요.